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무라 헤이타로 (문단 편집) === 버마에서의 기무라 - 일본판 [[원균]] === 기무라의 부임 이후 버마 방면군은 버마 전선에서 벌어진 170고지 전투, 람리 전투, 메이크틸라 전투 등에서 줄줄이 패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945년 [[영국군]]이 [[버마]]로 진공을 개시하자 버마의 방위는 수세에 몰렸다. 이때 기무라는 영국군의 버마 침입을 알고는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아무런 지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후술할 출처 불명의 야사가 아니라, 다무라 마사타로(田村 正太郎, 1908~?)가 저술하고 1985년 1월 출판된 '버마 탈출기·외교관이 본 버마 방면군 궤멸의 날'에서 인용한 정보라고 한다.] 4월 13일 버마의 수도 [[랑군]] 북서부의 방위선을 지휘하던 28군 사령관이던 [[https://ja.wikipedia.org/wiki/桜井省三|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현지에서 벗어나려는 기무라에게 "전쟁 진행 속도가 빨라 랑군이 전장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랑군이 공격받는데 방면군 사령관이 이동하거나 달아나면 작전상 곤란을 초래한다."라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다시 "방면군 사령부를 빨리 [[태국|시암]] 고원으로 전진시켜 제 1선에서 지휘하시오."라고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기각했다. 방면군 참모장이던 [[https://ja.wikipedia.org/wiki/田中新一|다나카 신이치]](田中新一)도 "방면군 사령부는 의연하게 랑군에 남아 현실적인 통제를 가하면서 정신적으로 중심을 잡아야 방면군 스스로가 랑군을 지켜낸다."고 주장했지만 기무라는 다나카가 출장을 나가 있는 때를 틈타서 사령부의 철수를 결정했다. 4월 23일 기무라는 전선에서 고생하던 예하 부대 및 [[일본]]이 지원하던 [[버마]] 정부의 바 모우 수상, 자유 [[인도]]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및 일본 거류민들을 그대로 놔둔 상태로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랑군을 탈출해 태국 국경지대인 몰메인으로 철수(사실상 도주)했다. 기무라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사령부의 랑군 포기로 방면군의 지휘계통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교전하던 제28군은 적진에 고립되어 여기서 탈출하려던 부대원의 반수 이상이 죽는 궤멸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참고로 보통 전투에서 사상자 20~30%면 전멸로 간주되는데, 제28군에서는 사망자__만__ 50%가 넘었다.[* [[임팔 전투]] 사상자 비율이 약 60%였다.] [[버마]]와 인도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총 약 14만 4천 명이었는데, [[버마]]에서의 전사자 중 무려 '''52%''' 가량인 약 '''7만 5천 명'''이 기무라 헤이타로가 도망친 직후에 나왔다고 한다.[* 임팔 전투에서는 기무라의 적전도주 후 일본군 사망자의 약 '''70%''' 정도인 5만 2천 명이 사망했다.] 즉 기무라가 제대로 된 지휘만 했었다면 적어도 그럭저럭 버마 방어전이 가능했다는 이야기이다. 남은 사람들은 육지로 탈출했는데, 거기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도 이 당시에 버마에 있었는데, 기무라가 사령관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하다가 자신의 부대원들이 분리되어 정글 속에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죽을 때까지 평생 [[PTSD]]를 앓았다고 한다. 임종 전 혼수 상태로 남긴 말이 "적중 돌파로 분리된 부대를 어떻게 해서든 장악해야 한다!"이었다. 해석하자면 퇴각하면서 잃어버린 내 부대원들을 어떻게든 구출해야 한다는 의미. 시게사부로는 평생 동안 부하들을 살리지 못한 자책과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 스스로 도망쳐 [[군인]]으로서의 지휘 책임도 저버렸고, 동맹국의 요인들도 깡그리 무시하며 달아난 기무라 헤이타로의 처사는 [[버마]]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심지어 기무라한테 관심이 죄다 쏠리는 바람에 똑같이 무단이탈을 한 [[도미나가 교지]]의 적전도주를 크게 징벌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기무라는 도망 이후 본토에서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1945년 5월 7일 육군 대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의 기강이 얼마나 해이했는지 보여주는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